작은 사찰에서 자란 신묘한 어린 승려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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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4.3평화문학상 수상자' 제주 원로 소설가 양영수 씨가 새로운 도전에 나선다. 분량은 짧지만 반전과 여운을 남기는 꽁트 소설을 격주로 [제주의소리]에 연재한다. 일명 '양영수의 스마트소설'이다. 모바일 인프라가 널리 보급된 시기에, 스마트폰으로도 부담 없이 읽을 수 있는 꽁트를 독자들에게 소개한다는 취지다. [편집자 주]   글 내용을 바탕으로 제작한 AI 이미지 ⓒ제주의소리 내가 김정희를 만난 것은 **재래시장 채소가게에서였다. 나보다 먼저 와서 채소를 고르고 있는 낯선 스님의 옆모습을 무심코 바라보며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 얼굴이 부산아파트전세대출
심상치 않아 보였다. 내가 **대학 국문과에 다닐 때, 2학년만 마치고 출가出家 입산해버린 김정희임을 한참만에야 알아볼 수 있었다.  "야, 너, 김정희 아냐." 다짜고짜 말을 거는 나를 그녀는 금방 알아보더니 얼른 일어서며 두 손 모아 합장한 채로 관세음보살 나무아미타불, 염송을 하였다. 나는 하도 뜻밖의 일이라 어리둥주택청약종합저축 소득공제 한도
절했지만 반가움과 다정함이 묻어나는 그녀의 인사말에 일시에 녹아들어가는 심정이었다.  정희는 나하고 고등학교까지 같이 다닌 다음에 같은 대학 같은 학과에 들어간 지근한 친구 사이였다. 근 30년 만의 조우였으니 채소가게에서의 간단한 만남으로 끝내버릴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가사袈裟입은 여승하고 아무데나 동행하는 것도 어울리지 않았다. 더구채무통합
나 정희 스님에게는 같이 온 일행이 있었다. 김 보살이라고 불리는 일행은 문방구에 무슨 그림 도구를 사러 갔다고 했는데 잠시 후에 돌아온 것을 보니까 겨우 중학생 나이 정도로 보이는 소녀였다.  "인사해라. 우린 옛날부터 친구란다.""안녕하세요. 김 보살입니다.""아, 김 보살…" 아직 보살이라고 불리기는 어린 나이인 것학자금대출 특별추천 기간
도 그렇고, 제주도 사람 답지 않게 갸름해 보이는 얼굴에 유난히 짙은 눈썹을 보니 나는 어쩐지 쉽게 인사말이 나오지 않았다. 나는 정희가 주는 명함을 받아 쥐고서는 적당한 때를 봐서 그녀가 주지스님으로 있다는 '남방선원'으로 방문 가기로 하고 아쉬운 작별을 해야 했다. 남방선원은 조천에서 한라산 쪽으로 올라간 곳에 있는데 제주시내에서 가도 그다지 멀지 않다한국장학재단 생활비대출 기간
고 하였다.  자가용차 운전대를 잡고 휙-하고 떠나는 정희 스님을 보낸 후 나는 그녀가 준 명함을 한참이나 바라보면서 사람의 알 수 없는 운명의 오묘함을 음미하는 기분이 되었다. 남방선원의 주지스님 남명南冥이라니, 법명이 가리키는 대로 남쪽나라의 큰 바다를 껴안고 살겠다는 정희 스님이 겪어온 세상이 어떤 것이었을지 꼭 가서 봐야겠다는 생각무직연체대출
이 들었다.  우리 두 사람이 국문과에 다닐 때는 모두가 작가가 되겠다는 야무진 결심을 보여주었었는데 그 후의 귀추가 궁금하였다. 문학 작품이라는 허구의 세계를 상상해 보는 것보다 실지 인생살이를 겪어보는 쪽이 그녀의 심성에 더 맞았는지, 허구한 날 구름 잡는 허망한 작가 생활에 헉헉거리는 나 자신의 처지와 어떤 비교가 될지, 궁금하지 않신협주택담보대출금리
을 수 없었다. 남명 스님은 내가 국어교사가 되었다는 것 정도는 나의 근황을 알고 있었다.  약속했던 대로 나는 이로부터 두어 주일이 지난 어느 날 남방선원에 전화로 통고한 다음에 오후 시간을 잡아 그곳으로 갔다. 남명 스님 정희는 혼자였다. 작은 암자 같은 절간이었는데 두 칸 방 중에 하나는 불상을 모신 법당이었고 다른 쪽 방은 여자 두임야대출
사람의 살림방이었다. 저번에 시장에서 봤던 김 보살이라는 소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혼자 쓸쓸하지 않으냐는 나의 질문에 대해 이런 생활에 20년 가까이 이력이 붙어서 견딜 만하다는 대답이었다. 4월 초파일 석가탄신일이나 백중날 등 불교 기념일에는 전속 신도들이 20~30명 다녀가고 평일에도 심심치 않게 신도들 출입이 있으니 작은 절간 하나 다스리는 보집담보대출서류
람은 있다는 얘기였다. 대학을 중퇴한 다음에 바로 경상도 어느 지방의 승가대학과 역사 있는 비구니 사찰에서 수련 과정 같은 것을 거친 다음에 이곳으로 왔는데 그런 식으로 작은 암자를 맡아 홀로 비구니 생활을 하는 예는 전국적으로 수십 명이 된다고 하였다.  절간 생활에 대한 대체적인 설명 다음에 우리 얘기는 저번 날 봤던 김 보살에게로 집디즈니 체크카드
중되었다. 동거한지 이제 15년이나 되는 김 보살이 자신의 산사山寺 생활에서 큰 의미를 차지한다는 얘기였는데, 이에 관련된 스토리 자체가 나에게도 큰 관심과 흥미를 끌었다. 김 보살은, 나로서는 국어사전에서만 본 적이 있는, 업둥이라고 했다. 자신이 과거에 쌓은 업業의 힘이 기어코 나타나서 그 사람의 미래의 삶의 방향을 결정한다는 불교적인 설명이 따라다니는 사건이 불교 사찰에서 일어났다니 더욱 실감이 났다. 정희가 남방선원을 창사創寺한 후 그동안 서너 명의 업둥이가 절간 문전에 등장했었는데 김 보살을 빼고는 모두 사내아이여서 여기 신도들 가정으로 입양되었고, 김 보살만은 계집아이여서 비구니 주지승 몫이 되었다.  이 절간에 나오는 신도들의 자비로운 협력을 얻고서 공들여 키워놓은 김 보살은 이제 정희에게 없어서는 안 될 가족이 되었고, 김 보살의 현재와 미래를 걱정하고 구상해 보는 것이 제일 보람되고 즐거운 일이 되었다. 가까운 마을에 조그만 초등학교가 있어서 6년간의 제도권 교육을 이수할 수 있어서 다행이었지만, 더 이상은 학교 교육을 시키지 않을 계획이다. 그 정도로 글을 읽고 쓸 줄 알았으면 저 스스로의 인생행로를 열어갈 준비가 되었다는 이유다. 이렇게 생각하게 된 데에는 나름대로의 믿는 구석이 있었다.  김 보살에게 비범한 신기神氣와 영기靈氣가 있다는 것은,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를 듣고 즐거운 소리인지 슬퍼하는 소리인지 구별하는 데에서부터 나타났다고 했다. 처음에는 그것이 그냥 농담으로 해본 소리일 것으로 생각했다고 여겼다. 그런데, 한번은 들고양이 새끼가 들개에게 물려 죽은 사건을 어미 고양이 울어대는 소리를 듣고 알아내는 것을 보고서는 그런 것이 바로 이 아이의 영기라고 믿게 되었다고 놀라워했다. 그러지 않고서야 어떻게 자기가 한 번도 들여다보지 않았던 덤불 속에서 죽은 고양이 시체를 발견하겠냐는 얘기였다. 김 보살을 데리고 동문시장 채소가게를 몇 번 다녀오는 동안 익혀둔 눈썰미를 가지고, 산사 인근의 잡초 풀밭에서 더덕을 무더기로 발견한 적도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시장에 팔러 나온 더덕을 알아볼 따름이지, 산중에 지천으로 돋아나는 더덕 근거지를 까맣게 몰라봤다는 것이다.  김 보살의 남다른 영기는 이밖에도 있다. 동식물 생태계의 특수 현상하고 감각이 통하는 것은 우연의 일치 결과라고 할 수 있겠지만, 우연이라고 할 수 없는 자활적인 행동에서도 김 보살의 영기가 나타났다. 지기地氣하고 통하는 행동이랄 수 있는 게 있었다는 것인데, 혼자서 길 없는 숲속이나 야산을 돌아다닌다든가, 캄캄한 밤중에 혼자서 한적한 곳 외출을 하는 등, 열 살 아래 나이의 정상적인 아이로서는 있을 수 없는 행동을 한 적이 비일비재했다는 것이 남명 스님의 얘기였다. 김 보살의 눈과 귀에서는 뭔가 환각처럼 보이고 들리는 것이 있지 않았겠느냐는 추측이었다. 전혀 알 수 없는 출생의 비밀처럼 김 보살이 커가면서 보여주는 기이한 사건들은 남명 스님으로 하여금 자연스럽게 비상한 관심과 배려를 촉구했다는 말을 나는 귀 넘어 들을 수가 없었다. 남명 스님이 바라는 것은 김 보살이 갖고 있는 신기와 영기를 앞으로도 잃지 않고 지니는 것이다. 그런 비범한 능력을 지니게 된 것은 학과 성적의 노예가 되어버리는 제도권 학교 교육의 세뇌를 안 받았기 때문이라는 게 정희의 생각이었다. 자식의 심리를 압박하는 부모가 존재하지 않았던 환경도 한몫했을 것이라는 얘기였다. 업둥이 김 보살을 절간 문전에 두고 갔을 모친은 단 한 번도 자기 존재의 그림자를 비치지 않았지만, 부친까지 그러지는 않았다. 자기 자식을 업둥이로 맡긴 다음에 이 절간을 느닷없이 찾아온 사람은 모친이 아니라 부친이었는데 그것도 딱 한번 무슨 저승사자처럼 홀연히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김 보살의 생후 세 해쯤 지나서 나타난 그 남자는, 자기 사정이 여의치 못하여 자식을 맡기기는 했지만, 몇 년 안에 반드시 찾으러 올 것이라고 말했고, 그 동안의 양육비로 돈도 얼마쯤 건네고 갔다. 딱 한번 이런 일이 있고나니까 말귀 알아듣는 시절 김 보살의 하루하루 생활의 질이 달라졌다. 너의 아버지는 멀지 않아 좋은 옷과 맛있는 것을 많이 갖고 와서 너를 데려갈 것이라고 꼬드길 재료도 생긴 셈이다. 이런 말을 들은 김 보살은 커가는 동안 꿈속에서 자기 아버지를 봤다는 얘기를 자주했다.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자기 아버지를 꿈속에서 만났다고 거짓말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고, 어린 아이들은 엉뚱한 꿈자리를 여러 가지 모습으로 경험하는 것이 예사라는 생각을 했다는 것인데, 남명 스님의 이런 생각도 터무니없다고는 할 수 없었다. 김 보살의 성장기 동안에는 꿈속에 현몽하는 아버지 얘기를 수시로 하다가 언젠가 그런 얘기가 끊겼다는 것인데, 그것은 부친이 사망했기 때문이라는 것이 김 보살 자신의 해석이었고, 이와는 다른 해석을 할 길이 없는 남명 스님으로서도 이를 그대로 믿을 수밖에 없었다.  나는 참을 수가 없어서 김 보살은 지금 어디 갔느냐고 물어보았는데, 남명 스님은 부처님 같은 은혜가 느껴지는 사연을 토로하였다. 한창 커가는 아이의 교육 문제를 소홀할 수가 없어서 초등학교 졸업 후에는 그림 공부를 시키는 중이다. 마침 아랫마을에 거주하면서 화실을 차린 이 지방 화가에게 찾아가서 1주일에 두 번 방문 교육을 받고 있는데, 이것은 김 보살이 초등학생 시절 유난히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다는 과거 사실에 근거한 배려다. 이지적으로나 감성적으로 남의 간섭을 받음이 없이 최대한의 개성 발휘와 자유로운 영혼을 허용하는 공부가 그림 그리기라는 것이 남명 스님의 믿음이다. 저번 날 김 보살이 그림 도구를 사러 갔던 시장 나들이가 생각나면서 나는 남명 스님의 자상한 배려에 대해 존경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본 것처럼, 외진 곳 작은 암자에서 단 두 사람만이 사는 생활은 세상과 거의 절연된 것인데, 무슨 일로든 사람 사는 마을을 드나든다는 것은 최소한도의 세상 공부라는 점에서도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로부터 몇 달 후 나는 **재래시장에서 다시 남명 스님을 만날 수 있었다. 나를 보자 마자스님이 꺼낸 이야기는 김 보살이 감쪽같이 사라졌다는 것이었다. 어디로 간다는 말은 없이 작은 종이쪽지에, 그동안 키워주신 은혜를 잊지는 않겠다는 간단한 내용만 쓰여 있었다고 했다. 가지고 나간 노잣돈은 있었느냐는 나의 질문에 대해 급한 돈 얼마는 있었을 것이라는 얘기였는데, 그림 공부하는 등 필요할 것이라고 매달 얼마씩 준 용돈을 쓰지 않고 챙겨두었다가 갖고 나간 것 같다고 하였다. 나는 적당한 위로의 말을 궁리해 봤지만, 건강한 몸이고 착한 사람이라서 잘 살아갈 터이니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이라는 말밖에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남명 스님의 생각은 달랐다. 김 보살은 다른 사람들 사는 세상에 호기심이 동해서 집을 나간 모양인데 멀지 않아 돌아오리라고 믿는다는 것이다. 시끄러운 세속사회에 적응해서 사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겪어보면 산사생활이 그리울 것이라고 했고, 그래야만 자기가 다스리는 남방선원을 안심하고 맡길 것이 아니냐는 얘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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